자격·진로 여정/시리즈 001: 생명을 증명하는 종이들

시리즈 1: 생존을 증명하는 종이들 — 3편(EP03): 공무원을 내려놓고, 생활을 바꾸고, 배관 설계로 향하다

dokwang82 2025. 12. 21. 21:16

2편에서 나는
세무공무원 시험이
면접에서 무너진 장면까지 적었다.
그 뒤의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돌아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의욕이 꺼진 사람의 생활이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그 시간을 그대로 적어보려 한다.

필기는 붙었고, 그해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해 나는
세무공무원 필기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같은 해,
세무사 1차 시험도 합격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잡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안은 완전히 달랐다.

면접 과정에서 겪은 일들,
그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펴도 글자가 흐렸고,
뭘 계획해도 금방 무너졌다.
“노력하면 된다”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는 상태였다.
그때의 나는
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그해 면접에서 떨어졌다.

다음 해, 공무원도 세무사 2차도 같이 무너졌다

그래도 다음 해에
공무원 시험을 한 번 더 보긴 봤다.
하지만 결과는
한두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해에는
세무사 2차도 응시했지만
결국 떨어졌다.

두 시험 모두
“실력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보다 먼저였던 게 있다.
의욕이 완전히 없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시험은 그냥 날짜만 다가오는 행사처럼 지나갔다.
내가 공부를 ‘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 낙방들은
“다음엔 더 잘하자”가 아니라
“이제 정말 끝”처럼 느껴졌다.

장사로 현실에 붙어보기, 그리고 인천에서의 자취

시험을 내려놓고
나는 친척과 함께
치킨과 술을 파는 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했다.
이 시기에는
부모님과 떨어져
인천에 방을 구해서 생활했다.

하루가 “공부”가 아니라
“장사”로 채워지니까,
내 몸은 어쨌든 움직였다.
매장에 서서 사람을 상대하고,
물건을 받고,
정리하고,
마감하고,
다음 날을 준비했다.
인천에서 혼자 지내며
장사에 매달린 시간은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연습 같았다.

그 몇 달은
성공과 실패로만 요약하기 어렵다.
장사라는 세계를 한 번 통과했고,
그 과정에서 “사람 앞에 서는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하지만 장사는 여러 이유로 오래가지 못했다.
몸도 좋지 않았고,
상황도 좋지 않았다.

장사를 접은 뒤, 아버지와의 마찰 그리고 성남의 사촌형 집

장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아버지와 큰 마찰이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는 더 버티기 어려웠다.

그때 나는
성남에 있는 사촌형 집으로 갔다.
한동안 신세를 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은 도망이라기보다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숨을 돌릴 곳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관광지 숙박업 2주, “배웠지만 내 길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나는
“아예 다른 생활”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관광지의 숙박업 현장으로 들어갔다.
제주도였고,
기간은 보름 정도였다.
짧았지만
그 보름 동안 배운 건 많았다.
  • 예약을 받고, 문의를 정리하는 방식
  • 홍보와 응대의 기본 흐름
  • 객실 정비(청소, 침구 교체, 화장실 정리)
  • 고장 접수와 간단 조치(기기, 보일러, TV 등)
  • 잡일처럼 보이지만 필수인 일들(페인트, 잔디, 분리수거, 창고 정리)
  • 숙소를 “운영”한다는 감각(가구·가전·인테리어의 유지)

그런데 내가 느낀 현실은
‘관광’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쉬는 시간도 기대와 달랐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나는 보름만에 결론을 냈다.
배우긴 했지만,
이건 내 길이 아니었다.

숙박업에서 남은 가장 큰 깨달음, “면허는 있는데 운전을 못 한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한 가지가 크게 박혔다.
차가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편해진다.
그리고 또 하나를 인정하게 됐다.
나는 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제대로 못 했다.
그 사실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운전은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해야 한다고.

중고차 한 대, 그리고 첫 고속도로 실전

돌아온 뒤
큰어머니가 중고차를 한 대 넘겨주셨다.
문제는 내가 운전을 못 한다는 거였다.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었다.
차를 직접 받아
집까지 끌고 와야 했다.
그날 나는
고속도로에 올라갔고
차선 변경이 너무 무서워
같은 구간을 몇 번이나 빙빙 돌기도 했다.
비상등을 켜고
어떻게든 버텨서 도착했고,
주차를 하고 나서야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 경험으로 확실히 알게 됐다.
운전은
면허가 아니라 실전이다.
몸이 배워야 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건설기술 교육 1개월, 거푸집기능사, 그리고 현장에서의 한계

다음 단계로 나는
수도권의 한 건설기술 교육기관에 들어갔다.
거푸집(형틀) 쪽을 배웠고,
거푸집기능사를 취득했다.
수료 후에는
현장에 나가 형틀 일을 했다.
그런데 한여름이었다.
몇 번이나 어지러움이 왔고,
쓰러질 뻔한 순간이 반복됐다.
그 일의 리듬과 체력이
그때의 내 몸과 맞지 않았다.
나는 결론을 냈다.
이 일은 오래 하기 힘들겠다.

“한국에서 살기 싫다”는 감정, 그리고 이민이라는 도피가 아니라 계획

면접에서 겪은 경험은
내 안에 이상한 흔적을 남겼다.
분노도 있었고,
허무도 있었고,
무력감도 있었다.
그 감정이 한 문장으로 굳으면
“한국에서 살기 싫다”가 됐다.
그래서 이민을 알아봤다.
기술 교육을 받고,
절차를 밟아,
기술 이민을 시도하는 루트들.
하지만 생각보다 벽이 많았다.
정보도, 절차도, 비용도,
그리고 내가 가진 기반도
그때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탐색은 의미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어디서 살 것인가’를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시작했다.

방향을 바꿔서 결론에 도착하다, “배관 경력을 쌓아야겠다”

이민을 당장 밀어붙이기 어렵다면,
먼저 “쓸 수 있는 경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현장에서 배관 일을 배우고,
그 경력을 기반으로
다음 문을 열어보자.
그 방향으로
조선소 협력사 현장에 들어갔다.
나는 그냥 일을 했다.
야근과 토요일 근무까지 했는데도,
내가 느끼기엔
시간 대비 얻는 게 크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니
일은 대략 파악됐고,
성장보다는 반복이 보였다.
나는 이대로는
시간이 흘러가 버리겠다는 불안을 느꼈다.

마지막 전환, 파주 경기인력개발원으로

그러던 중
기계설계 쪽 직업훈련 광고를 봤다.
기숙사 제공,
훈련수당,
국가 지원 교육 같은 조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면접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현장을 정리하고
파주에 있는 경기인력개발원으로 갔다.
그때 내 안의 욕구는 하나였다.
배관 일을 제대로 하려면
현장 배관만이 아니라
설계까지 알아야 한다.
‘완성된 배관’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현장에서도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공무원을 내려놓고,
생활을 바꾸고,
결국 배관 설계 쪽으로 이동하게 된 구간이다.
다음 편부터는
경기인력개발원에서의 훈련과
그 이후 현장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어 적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