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진로 여정/시리즈 001: 생명을 증명하는 종이들

시리즈 1: 생존을 증명하는 종이들 — 9편: 몰입의 대가와 팀장 역할의 무게, 두 번째 퇴사

dokwang82 2026. 2. 13. 15:04

8편에서 나는
권한 없는 책임과 과부하의 구조 속에서
무너지는 장면들을 겪었다.
9편은 그 다음,
원설계 회사로 옮긴 뒤의 이야기다.

일이 다시 재미있어졌고
그래서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때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몰입은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망가뜨렸다.

일이 다시 재미있어지자, 나는 멈추는 법을 잊었다

원설계 회사에서 나는
프로세스 배관 설계를 다시 맡았다.
열심히 한 이유는 단순했다.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실수를 하고 나서
오히려 설계를 더 이해하게 됐다.
현장 경험이 쌓여 있었고
그 경험이 설계 판단에 직접 연결됐다.
그때는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중간에 같이 움직이던 사람이
일을 너무 안 해서 흔들린 적도 있었다.
관두고 싶었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에 하나가 남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어쨌든 한 번은 끝까지 완성해보자.

그때의 나는
거의 일만 생각했다.
집에서도 일을 생각했고
주말에도 일을 생각했고
그 감각이 1년 내내 이어졌다.
그때는 그게 위험하다는 걸
정말 몰랐다.

팀을 유지하려고 내가 떠안았던 것들

설계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팀이 유지되지 않았다.
회사에 일이 없으면
팀은 흔들리고
결국 구조 조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팀장 자리라는 건
팀원이 있는 만큼
일을 계속 끌고 와야 유지되는 구조였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그냥 처리해버린 적이 많았다.
내가 막아주면
팀은 당장 편해진다.
하지만 그 비용은
내 쪽으로 쌓였다.

나에게는 인사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안 뒤부터
팀원들이 조심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야근도 거의 없게 만들었고
성과도 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팀원들에게
무리해서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불필요한 야근도 없었으면 했다.
그런데 어떤 팀원은
본인이 욕심이 나서 맡겠다고 해놓고
돌아서서는
본인은 일을 많이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팀장은 일만 시키고
정작 팀장은 일을 안 한다는 말까지 붙었다.

나는 야근을 안 시키려고
출근하면 이동도 최소로 하고
계속 책상에 앉아서
처리할 일을 먼저 밀어냈다.
그런데도 현실은 달랐다.
어떤 사람은
담배 피우는 데만 하루 2~3시간을 쓰고
야근을 남아 있는 시간으로 포장했다.
그리고 야근을 안 하는 나를
비난했다.

내가 15분이면 끝내는 일을
3~4시간씩 잡고 있는 장면도 봤다.
내가 하루면 처리하는 일을
1~2주씩 끌고 가는 장면도 봤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일을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
처음엔 격려로 칭찬을 했는데
그 칭찬이
착각의 근거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들

팀원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상한 패턴을 많이 봤다.
친하든 친하지 않든
결과는 비슷했다.
조금 할 줄 알게 되면
자기가 배운 건 잊어버리고
내 힘으로 하는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일부러 아무 말도 안 하고 지켜봤다.
그랬더니
내가 알려준 것만 겨우 하고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알려준 일조차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로젝트를 한 번 경험하면
그 한 번으로 다 할 줄 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기준을 판단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안다.
프로젝트마다 기준은 바뀐다.
환경도, 요구도, 책임의 방식도 바뀐다.

게다가 기술은 더 빨리 변한다.
계속 새 걸 익히고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한 번 해봤다에서 멈춘다.
그 순간 성장은 멈추고
그 부담은 다시 팀장에게 몰린다.

지금의 결론, 실력과 보상은 연결돼야 한다

지금은
실력에 맞춰 보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실력이 부족해도
대우를 잘해주면
사람이 노력할 거라고 믿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실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대우만 먼저 주면
노력보다 먼저 생기는 게 있다.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다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현장에서 꽤 흔하게 나타난다.
그때 나는
어이가 없다는 감정부터 먼저 배웠다.

두 번째 퇴사, 프로젝트를 옮기는 대신 회사를 떠났다

나는 회사 안에서
다른 프로젝트로 옮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회사를 관두기로 했다.
같은 회사에 있으면
계속 무언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이미 나빠져 있었다.

잠시 쉬고 다시 다닐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익숙해질수록
재미는 점점 빠졌다.
그때의 나는
다른 일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퇴사를 했다.

퇴사 전에는
평생교육 실습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몸이 안 좋아져서
실습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다.
나는 먼저 회복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태양광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건강을 회복한 뒤
그 일을 하려고 원주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원주는 도시이면서
서울에서도 멀지 않고
공기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선택은
다음을 위해 나를 다시 세우는
첫 단계가 됐다.

EP9 마무리의 감각

나는 일을 못 해서 무너진 게 아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이 늘어나는 구조에서
권한 없는 책임을 떠안은 채
몸이 먼저 망가져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의지로 관뒀고
지금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얻었다.
동시에 휴식 없는 몰입이
또 다른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원주로 향한 선택은
다음을 위해 나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몰입만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리듬으로
내 삶을 운영하는 법을 찾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