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진로 여정/시리즈 001: 생명을 증명하는 종이들

시리즈 1: 생존을 증명하는 종이들 — 8편: 과부하 폭발과 리비전 지옥, 그리고 함께 퇴사

dokwang82 2026. 2. 13. 15:01

7편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갔다.
8편은 그 다음이다.
그 상태가 어떻게 폭발했는지,
왜 결국 퇴사로 이어졌는지,
그 흐름을 그대로 적는다.

기계실 설계를 하러 갔는데, 시작부터 기계실이 아니었다

나는 기계실 배관 설계를 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시작부터 현장이었다.
배관 서포트 구조물,
폐수 배관,
가설 구조물,
프로세스 배관,
품질과 공사 관련 업무까지
대부분이 내게로 몰렸다.

팀원은 초보였다.
문서 번호부터 틀려 있었다.
그래서 기본 체계부터
다시 잡아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설계자가 아니라
현장의 완충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답은 없었다

나는 대표에게 말했다.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하지만 돌아온 말은 비슷했다.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월 천만원을 줘도 못 구한다.
결론은 단순했다.
사람이 없으니 내가 처리한다.

경력자가 왔지만, 실무는 늘지 않았다

대표가 보낸 사람은 경력자였다.
그리고 내 위로 붙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설계를 하기보다
사람 관리만 하려는 쪽이었다.
실무 설계 실력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늘어난 게 아니라,
보고해야 하는 층만 하나 늘었다.

폐수 배관 수정은 내 일이 아니었는데, 내 일이 됐다

폐수 배관 설계는
원래 내가 잡은 일이 아니었다.
대표가 설계한 것이었다.
담당자를 붙이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발주 라인에서 문제가 나왔다.
수정해서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기준 회의 참석자와
미팅을 잡았다.
그 기준대로 수정해 제출했다.

돌아온 반응은 다시 잘못됐다는 말이었다.
지적한 대로 바꾸면,
이번엔 처음 수정이 맞으니
다시 원안대로 내라고 했다.
이건 해결이 아니라 왕복이었다.

리비전 지옥은 난이도가 아니라 기준 붕괴에서 왔다

수정의 문제는
도면 난이도보다 구조였다.
기준이 흔들리면
업무는 왕복이 된다.
수정하고,
제출하고,
반려되고,
다시 수정한다.

되돌림이 나오면
도면만 바꾸는 게 끝이 아니다.
리비전,
문서 번호,
배포본,
공유본까지
다시 정리해야 한다.
약속된 일도 아닌데
여기에 시간을 계속 빼앗겼다.

새벽 출근, 자정 퇴근, 주말 출근이 이어졌다

나는 새벽 5시에 출근했다.
밤 12시에 퇴근했다.
주말도 나왔다.
몸이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정신도 같이 닳아갔다.

우리는 2차였고, 1차의 실수까지 떠안는 구조였다

우리는 2차 업체였다.
원래라면 1차가 기준을 잡고,
2차는 그 기준에 맞춰
디테일을 맞추는 구조다.

그런데 1차 설계팀의 기준이 흔들렸다.
도면 충돌과 변경이 통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1차가 실수하면,
그 실수 처리까지 2차인 우리가 떠안았다.

내 제안이 맞아도
위에서 수정 지시가 내려오면
업무는 몇 배로 늘었다.
내가 틀려서가 아니라,
권한 라인이 흔들려
왕복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을 할수록 일이 줄지 않는다는 감각

나는 해결이 쌓이면
일이 줄어드는 감각이 필요했다.
그런데 여기는 반대였다.
한 건을 처리하면
그 처리 결과를 기반으로
새 요청이 붙었다.

수정이 꼬리를 물었고,
문서와 리비전이 다시 흔들렸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팀이 돌아가려면, 내가 실무를 내려놔야 했는데

팀원들이 일을 할 수 있었다면
나는 정리할 시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내가 실무를 내려놓으면
일이 멈췄다.
내가 실무를 잡으면
체계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그때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이 이미 한계라는 걸.

결국 내 의지로 관뒀다

나는 무리해서 버티지 않았다.
내 의지로 관뒀다.
버티는 게 미덕이 아니라,
버티면 사람이 무너지는 구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을 관둔 뒤부터는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감각이 생겼다.
그리고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 같이 퇴사하고, 다시 정리하자는 쪽으로 갔다

우리는 같이 관두고
한 번 더 해보자고 했다.
그때 Revit을 공부했다.
다른 회사 취업도 같이 알아봤다.
여러 오퍼가 왔다.

그리고 더 나은 곳으로 갔다.
그곳은 원설계를 하는 회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셋 다 같은 급여,
같은 조건으로 맞춰
다시 일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는
원설계 회사에서의 몰입과
팀 운영,
그리고 두 번째 결심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적는다.